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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면과 미완의 혁명
- 이주희 위원 -

202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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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사면과 미완의 혁명 / 이주희    원문보기


이주희 ㅣ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 출처 : 한겨레(2021. 1. 25)


헬조선의 원조 조선왕조의 오백년 역사에서 이순신 장군을 제외한다면 진정한 영웅을 찾기 힘들다. 특히 훌륭한 왕은 정말 드물다. 백성에게 자애로웠다는 세종대왕조차 상하를 바로잡고 어쩌고 하는 예조판서 허조의 말을 좇아 수령고소금지법을 제정한 바 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겪어 수령을 고소해도 장 100대에 3년간의 징역이라니. 과거에 합격하면 온갖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챙기고 양민까지 부려먹으며 여종을 겁탈하는 것은 일도 아닌 탐관오리가 넘쳐났고, 사대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공신으로 책봉되면 부여되는 무한 권리와 그 권세를 등에 업은 자들의 탐욕은 결국 나라를 패망시켰다.


수령고소금지법은 종종 사대부를 위한 법이라 여겨지지만, 왕을 위한 법이기도 하다. 상하를 구분하기 위한 법이라면 상 중의 최상은 왕이 아닌가. 조선왕조 내내 왕을 처형한 사례가 없다. 물론 정황상의 독극물 중독이나 사고로 위장된 살해는 차고 넘쳤겠지만 권력 다툼 중에 발생한 사적인 보복은 공식적인 처형과는 그 결이 다르다. 연산군도 그저 자리에서 물러나 유배되어 병으로 죽었을 뿐이다. 심지어 극심한 수탈 끝에 반봉건의 기치를 들었던 동학농민혁명조차 자국민을 치기 위해 청에 파병을 요청하고 일본의 침략을 허용하여 망국의 길을 열었던 어리석은 왕조를 부정하지 않았다.


반면, 서구는 공화정으로 가는 길목에서 왕을 처형한 경험이 있다. 영국의 국왕 찰스 1세는 세계 최초의 시민혁명인 청교도혁명으로 1649년 의회파 지도자 크롬웰에게 참수당했다. 전쟁을 위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의회와 갈등하다 의회를 해산시켜버린 탓이었다. 프랑스의 루이 16세 역시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하다 파산할 위기에서 제3신분이 주도한 혁명으로 공화정이 선포된 1792년의 다음해 초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그가 중도파 의견을 받아들여 프랑스가 입헌군주국이 되는 데 동의했다는 것도 왕정을 공식적으로 끝내고자 하는 혁명세력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다. 크롬웰이나 로베스피에르 등이 왕정 못지않은 독재를 펼치고 결국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해도 이러한 혁명이 궁극적으로 의회의 힘을 강화하여 국민주권의 기틀을 세우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시민혁명의 경험 없이 국민의 주권을 독립운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보하였다. 그나마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도 쿠데타에 의한 독재가 끝난 1987년에야 겨우 시작되었지만, 불행하게도 외환위기의 혼란 속에 이루어진 독재자에 대한 섣부른 사면으로 어두운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이 불가능해졌다. 이 잘못된 특별사면은 연성 권위주의 딕타블란다(dictablanda)와 구분하기 어려운 불완전한 민주주의 데모크라두라(democradura)의 치명적인 한계였다. 덕분에 우리는 최근까지도 횡령과 뇌물수수, 언론탄압, 국정농단 등 민주공화국의 의미를 크게 퇴색시킨 제왕적 대통령들을 배출한 바 있다.


대통령을 왕으로 착각하여 무슨 짓을 하건 사면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은 미처 청산되지 못한 봉건적 사고의 잔재일 뿐이다. 조선시대의 신분구조는 와해되었을지 몰라도 봉건적 사고는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 내린 채 현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결합하여 유구한 헬조선 갑질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대한항공 땅콩 회항과 같은 사건은 다른 선진 자본주의국가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단순히 고용계약상의 차이를 넘어 새로운 신분제로 등극한 것도 우리 사회의 봉건성과 무관하지 않다.


2016년 말 시작된 촛불혁명은 우리가 한번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던 서구 시민혁명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또다시 섣부른 사면이 행해진다면 또 다른 미완의 혁명만 남게 될 것이다. 정치권은 언제나 믿기 힘들지만, 어려울 때마다 목숨을 바쳐 해준 것 없는 나라를 구해온 국민은 믿을 수 있다. 이번에는 뒤늦은 시민혁명을 꼭 완성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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