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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이효재와 유리천장
- 이주희 위원 -

20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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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이이효재와 유리천장    원문보기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 출처 : 한겨레(2020. 10. 26)


직접 만드신 학과를 졸업한 후배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이효재 선생님을 잘 모른다. 해직되셨던 탓이었을까. 대학 내내 뵙지 못하다가 1986년 마지막 학년 처음 선생님께 배웠던 것도 같은데, 민주화를 눈앞에 두고 대학가 시위가 절정에 이르렀던 만큼 온전히 학기를 마친 기억이 없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니 선생님께서는 이미 진해로 내려가신 뒤였다. 그래서 아쉽게도 책으로 선생님을 만났을 뿐이다.


하지만 책으로만 만난 선생님도 굉장했다. 이론으로 세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기인한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여성에 대한 차별과 연결시켜 독창적인 이론을 만든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사회과학이 탐구하는 세계는 다양한 인과관계가 동시에 진행되는 열린 체계이다. 어떤 한 사건이 하나의 원인이나 기제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 생겨난다. 과학적 설명은 바로 그 상시 연결성을 만들어내는 구조적 기제에 대한 이론을 함축하고 있어야 한다.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과 독립된 실존하는 구조적 기제를 파악하여 진실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이 이이효재 선생님의 학문이었다.


여성을 위해 그렇게 많은 기여를 해주셨음에도, 현실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바로 작년에도 유리천장 지수가 오이시디 국가 중 최하위였다. 500대 기업 중 여성 임원이 단 한명도 없는 기업이 절반을 훨씬 넘고, 여성 고위공무원 비중도 오이디시 국가 평균이 30%를 넘는 데 반해 우리는 7% 남짓한 수준이다. 코로나19로 모든 불안정 노동자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특히 여성 노동자의 어려움은 더욱 컸다. 경제 위기이든 전염병 위기이든 일자리를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잃는 사람은 예외 없이 여성이었다.


그렇다면 남성은 어떠한가. 모든 남성이 가부장의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가혹한 장시간 노동 끝에 아까운 목숨을 잃은 택배노동자의 사연이 연일 보도되어도, 그 가슴 아픈 사연은 매번 빠르게 소모되고 그 사실은 빠르게 잊힌다. 교묘한 원청 대기업의 책임 회피로 노동을 하지만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산재 처리도 받지 못하는 이런 부당한 구조는 잠시 눈에 띄는 사건 제목 뒤에 숨죽이고 있다가 항상 다시 어둠 속으로 침잠해왔다.


고학력 여성의 고질적인 승진 지체와 저소득 불안정 남성 노동자의 잇따른 과로사, 얼핏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이 두 현실은 일터에 아직도 만연한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장시간 노동이라는 동일한 기제들을 공유한다.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보수적 가족주의가 일터에서도 맹렬히 작동할 때 노동자는 부당한 처우에 저항할 힘을 잃고 사회는 그러한 저항을 무시해버린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여성의 미덕과 직장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노동자의 미덕은 한 동전의 두 얼굴일 뿐이다. 장시간 노동은 가사와 육아의 부담을 더 많이 지고 있는 여성의 경력을 단절시키고, 남성이 공평하게 돌봄에 참여하기 어렵게 만든다. 모든 것을 일터에 바치기에는 다른 부담이 너무나 많은 여성을 보이게 또 보이지 않게 차별하는 것은 생산성을 고려한 합리적 선택으로 포장된다. 그사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남성은 가족과 소중한 시간을 함께할 권리를 박탈당할 뿐 아니라, 그렇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죽을 수도 있다. 이이효재 선생님이라면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무엇인가 하셨을 것 같다.


이이효재 선생님, 진실에 기반한 정의를 찾아 매진하는 것, 인류의 지성과 윤리의식에 대한 따뜻한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이 아무리 험하더라도 공동체의 번영을 위한 탐험을 멈추지 않는 것, 이것이 제가 아는 진짜 사회학자, 이이효재의 참모습입니다.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아 그 뜻이 사회 곳곳에 자리 잡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되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선생님의 빛나는 삶을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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