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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나랏빚 한도, 숫자로 못 박진 말자
- 하준경 위원 -

20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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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빚 한도, 숫자로 못 박진 말자[동아광장/하준경]    원문보기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 출처 : 동아일보(2020. 10. 26)


지난해 베를린에서 독일 경제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독일도 주거 문제가 심각했고 공공 인프라도 낡아 예전 같지 않았다. 정부 재정의 역할이 더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특히 “한국은 유럽처럼 재정적자나 국가부채 한도 수치를 법으로 못 박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조언이 인상적이었다.


적자나 부채의 한도를 명시하는 재정준칙의 원조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연합(EU)이다. 미국과 일본의 준칙은 성격이 다르다. 미국은 적자나 부채의 한도는 정하지 않고 정부가 재량으로 쓸 수 있는 금액의 상한을 의회가 정하는 식인데, 그것도 종종 바뀐다. 일본은 수치는 정하지 않고 일상적 지출은 세입을 초과하지 말라는 식의 준칙을 운용하는데 1994년 이후 적용을 면제하고 있다.


유럽연합이 유독 재정준칙을 중시하는 건 통화 통합 때문이다. 회원국들이 유로화로 표시된 국채를 발행하게 되자 환율 위험이 줄면서 각 나라 국채 간의 차별성이 약해졌다. 이탈리아 국채와 독일 국채 간의 대체성이 커졌다. 유럽 금융시장에서 한 나라가 국채를 많이 발행해 자금을 끌어가면 다른 나라가 피해를 입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서로 조심하자고 국가부채와 그 원인이 되는 재정적자의 한도를 각각 국내총생산(GDP)의 60%와 3%로 정하는 준칙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준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남유럽은 유로화 표시 국채로 싸게 돈을 빌릴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고 독일은 환율 안정으로 무역흑자가 늘자 쌓인 돈을 남유럽에 기꺼이 빌려줬다. 이런 불균형이 남유럽 재정위기로 비화되자 유럽연합은 준칙을 더 강조했다. 실제로 위기 후 남유럽은 빚 갚느라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러나 그 결과 경제규모가 위축돼 국가채무비율은 더 높아졌다. 독일은 재정긴축 속에서도 수출경쟁력 덕분에 성장했지만 재정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해 인프라 투자와 디지털화 대응이 부족해졌다.


이 상황을 겪고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자 유럽도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일단 내년 말까지 재정준칙을 정지시키고, 유럽연합 이름으로 돈을 빌려 나눠 쓰는 유럽회복기금을 만들어 준칙을 비켜가는 자금 조달 경로를 구축했다. 재정준칙 자체도 재검토하고 있다. 최근 독일 재무부의 지원을 받아 올리비에 블랑샤르 교수(MIT), 예로민 체텔마이어 박사(IMF) 등이 작성한 보고서 ‘유럽 재정준칙의 재설계: 준칙에서 규범으로’를 보면 흥미로운 내용들이 담겨 있다.


이 보고서는 재정준칙은 폐기하고 재정규범(standards)을 도입하자고 제안한다. 유럽의 재정준칙은 그동안 수많은 부대조항이 추가돼 마치 세비야 대성당처럼 부속 구조물이 많이 붙어 전체적 일관성이 사라진 모양새가 됐다고 지적한다. 또 ‘간단한 수치로 요약되는 재정준칙’은 복잡하고 불확실한 현실에선 작동하지 않는 환상일 뿐이므로 사전적으로 수치를 못 박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 대신 “회원국들은 공공 부채의 지속가능성을 높은 확률로 보장해야 한다”와 같은 규범을 설정한 후 나라별로 지속가능성에 대한 평가를 받게 하자고 제안한다. 뉴질랜드의 재정준칙으로 알려진 재정책임법처럼 숫자를 정하지 않는 규범도 예로 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2006년에 만들어진 한국의 국가재정법도 하나의 재정규범으로서 웬만한 나라의 재정준칙보다 엄격한 투명성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재정준칙은 애초에 정치인들의 재정확대 편향성을 제어하자는 명분으로 고안됐다. 정치인들은 경제가 활황일 때도 재정축소를 꺼릴 것이므로 준칙으로 규율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재무관료 공무원들은 재정긴축에 편향된 유인체계가 내면화돼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출산율 자살률 가계부채보다 정부부채비율이나 신용평가사 국채 평점을 우선시한 적은 없었는가. 정부가 할 일을 시장에 떠넘긴 적은 없었는가.


불확실성의 시대다. 준칙이든 규범이든 숫자로 못 박지는 말자. 또 확장 편향성을 제어해야 한다면 긴축 편향성도 살펴보자. 민간 경제가 취약할 때 숫자 때문에 재정긴축을 시도하다 경제가 주저앉는 일이 생겨선 안 된다. 저출산 해결과 성장잠재력 확충을 위한 재정투자를 소홀히 하다 도약의 기회를 놓쳐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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