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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나랏빚도 잘만 운용하면 득이다
- 하준경 위원 -

20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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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빚도 잘만 운용하면 득이다[동아광장/하준경]    원문보기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 출처 : 동아일보(2020. 05. 11)


1700년 영국의 나랏빚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20% 정도였다. 이 비율은 계속 높아져 1820년경엔 260%까지 치솟았다. 나폴레옹 전쟁(1803∼1815년)을 치를 땐 영국 국가채무비율이 두 배로 뛰었다. 그러나 영국이 전쟁에서 이기고 대영제국 전성기가 도래하자 이 비율은 점차 낮아져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엔 30%가 된다.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인구가 1600만 명(1815년)으로 프랑스의 절반에 불과하던 작은 섬나라 영국이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나랏빚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이 돈은 전쟁, 해군 운영뿐 아니라 운하·철도·식민지 건설, 철공·섬유 산업에도 투자됐다. 재정 자금을 대규모로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은 1688년 명예혁명 후 영국 정부가 차입자로서 신뢰를 쌓아 자금 조달 비용을 크게 낮췄기 때문이다. 국가가 세금 징수 체계를 통제, 개선하고 재정 효율을 높여 채무 불이행 위험을 낮춤으로써 영국인뿐 아니라 네덜란드 투자자까지 영국 국채를 사게 됐다.


반면 프랑스는 영국 못지않게 나랏빚을 냈지만 세금 징수를 청부업자에게 맡기는 관행을 1789년 프랑스 혁명 때까지 지속했다. 세금을 둘러싼 비리와 지대(地代) 추구 행위들 때문에 징세 효율이 떨어지면서 국채 금리도 영국의 두 배에 달했다. 국운을 좌우한 것은 국가채무비율이 아니라 정부의 능력이었다.


국가채무비율은 수치 그 자체보다는 분자(국가채무)와 분모(GDP)의 동태적 움직임이 중요하다. 이 비율이 변하는 이유가 주로 분자 때문인지 아니면 분모 때문인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빚이 늘 때도 그것이 국가의 유무형 자산을 키우느라 느는 건지 아니면 낭비돼 그런 건지에 따라 그 효과가 다르다. 영국이 대영제국을 건설할 때, 또 미국이 2차대전을 거치며 패권국이 될 때 국가채무비율이 급등하고 이후 이 비율이 낮아졌던 것은 분자, 즉 나랏빚이 먼저 늘고 이후 분모, 즉 생산이 더 많이 늘어나는 선순환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랏빚을 줄인다고 꼭 경제가 튼튼해지는 것도 아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각국 정부가 부실을 떠안은 후, 유럽 재정 위기가 발생하자 유럽연합은 이탈리아에 긴축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결과 이탈리아의 국가채무비율은 오히려 높아졌다. 재정 적자를 줄이려는 노력이 분자(빚)보다는 분모(GDP)를 더 줄였기 때문이다. 2011년 117%였던 이탈리아의 국가채무비율은 2014년 이후에야 130%대에서 안정됐는데 2019년의 GDP는 2011년보다 더 작아졌다. 국가채무비율은 재정 확대 때문에 높아질 수도 있지만 재정 긴축 때문에 높아질 수도 있다.


한국에선 1분기 재정 적자가 급증했고, 3차 추경 후 국가채무비율이 45%를 넘을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자리와 삶, 산업을 지키기 위해 대규모 재정 적자가 불가피하고 다른 나라들보다 재정 상태가 양호하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갈 때의 불안감은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우려를 희망으로 반전시키고 도약의 발판을 만들려면 정부의 능력과 이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이다. 비전을 제시하고 필요한 투자는 과감히 하되 징세 능력과 재정 효율 같은 기본도 되돌아봐야 한다. 소득과 재산이 정확히 평가되지 않는 사례가 흔하고, 소득과 재산을 곳곳에 숨긴 채 부당하게 복지 혜택을 받는 이들도 꽤 많다. 징세 대상을 정확히 모르면 정책 전달 체계도 부실해진다.


최근 소상공인 초저금리 대출을 보면, 과거 자료에 의존한 데다 선별 기능이 불충분해 일단 줄부터 서는 상황이 벌어졌다. 만약 신용카드 자료 등 빅데이터로 경제적 피해를 실시간으로 파악해 피해가 큰 그룹에 우선권을 줬다면 어땠을까. 디지털 뉴딜을 재정 효율을 높이는 데도 적용하자는 것이다. 여러 기관에 산재한 소득, 자산 자료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통합 관리하고, 여기에 빅데이터 인공지능 기술을 결합하면 은닉된 세원을 찾고 실시간으로 상황을 파악해 정책을 집행하기도 쉬워질 것이다. 통제권을 막 휘두르자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맞는, 일 잘하고 믿을 수 있는 스마트한 정부를 만들자는 것이다. 전 국민 고용안전망도 이런 인프라가 갖춰져야 실현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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