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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념의 정치, 정치의 이념
- 이주희 위원 -

202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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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세상] 이념의 정치, 정치의 이념 / 이주희    원문보기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 출처 : 한겨레(2020. 04. 27)


나에게 각인된 이번 총선의 가장 큰 특징은 이념의 활용이 저조했다는 것이다. 우선 북한을 필두로 한 색깔론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경제에 무능한 좌파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말은 종종 언급된 듯하다. 하지만 유권자는 보수 야당을 참패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늘 활황을 누려왔던 이념의 정치를 종결시켰다.


우리가 특정 이념에 호명되는 것은 우리 삶의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그 이념이 끊임없이 검증되고 보상받기 때문이다. 이념은 비록 부분적일지라도 체득된 사실에 근거한다. 한때 태양이 지구를 회전한다고 믿었던 것이 실제로 지구에서 보았을 때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었기 때문인 것처럼, 박정희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 시대의 경제가 실제로 빠르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이념은 그 효용이 현실에서 크게 저하될 때 필연적으로 변화한다. 신자유주의 수십년간 악화일로의 경제와 극단적 양극화가 바로 지배적인 이념의 몰락을 이끌어낸 주된 배경이다. 대다수 국가에서 2008년 경제위기로 인한 여파가 지속되면서 경제는 천천히 망가져왔다. 따라서 코로나19로 유권자가 국정의 안정성을 원했기 때문에, 혹은 이번 정부의 투명하고 발 빠른 대처에 국민이 만족했기 때문에 선거에 지거나 이겼다는 것은 부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불완전한 평가일 수 있다. 이 바이러스는 보수 야당이 지지해왔던 이념의 핵심적인 문제점을 명징하게 드러내줌으로써 여당의 압도적인 승리에 훨씬 더 크게 기여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지배적 이념은 시장원리의 확대와 국가 역할의 축소를 주창했지만, 코로나19의 위기 속에 공공의료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선진국의 처절한 상황은 금융화된 세계 경제에서 공공성의 가치를 무시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보여주었다. 또한 코로나19로 인한 세계 경제의 위기는 2008년보다도 심각한 수준이라 국가가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위기 극복의 주체로 나서야 했다. 결국 보수 야당의 이념은 현실에서 그들을 지지할 수 있는 안정된 중산층의 크기를 물리적으로 축소시켰을 뿐 아니라 어렵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이 이념의 신뢰도에 대한 심각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이념의 정치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념은 내적 일관성도 결여하고 있다. 시장에서의 자본주의적 무한 경쟁은 보통 그 경쟁으로 인한 혁신이나 효율성보다는 불필요한 불안과 고통만 가중되는 사회의 최하층에 집중되어 있다. 최상층의 은행가와 거대기업의 소유주는 대마불사를 이유로 어떤 잘못된 투자나 투기로부터도 구제된다. 이런 극소수만을 위한 ‘금융 사회주의’는 다수 납세자의 피땀 어린 세금으로 유지되어왔다.


낡은 이념의 정치를 버리고 새로운 정치의 이념을 세우는 작업은 교육, 의료, 돌봄 등 시민의 삶의 질에 직결되는 서비스에 공공성을 최우선의 가치를 두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면 한다. 낮은 임금과 엄청난 장시간 노동을 최고의 경쟁력으로 삼아 산업화에 성공했다고 그때 체득한 생존의 기법을 21세기 위중한 글로벌 경제위기에 재활용하려고 하지도 말았으면 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불분명한 재정 건전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버리고 가끔은 기업뿐 아니라 나라와 경제를 위해 많은 희생을 감내해온 시민과 노동자를 위해서도 세금을 쓰면 좋겠다. 지금은 건전한 재정보다 극심한 수요 부진을 떨치고 민생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더 중요한 시기이다.


집권 여당이 선거 결과를 받아들고 기쁨의 환성 대신 진중한 숙고의 시간을 가진 것을 불확실한 위기의 시대를 현명하게 주도할 수 있는 정치의 이념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지배 엘리트의 끊임없는 순환론을 폈던 냉소적인 정치학자 모스카도 인정했듯이 사회적인 유용성을 결여한 지배층은 언젠가는 쇠퇴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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