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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선진국의 장기침체론이 주는 당혹감
- 주상영 위원 -

2020.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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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선진국의 장기침체론이 주는 당혹감    원문보기


주상영 l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국민경제자문회의 거시경제분과 의장    * 출처 : 한겨레(2020. 01. 09)


미국 클린턴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경제학자 로런스 서머스는 지난 수년간 줄기차게 장기침체론을 주장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서 한 특별연설에서 처음으로 장기침체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사실 미국 경제는 금융위기 충격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호황을 구가하고 있으니 서머스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 같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지난 3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전미경제학회에서 그는 장기침체의 논리를 보강하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핵심은 이자율의 지속적인 하락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경제성장률이 조금씩 하락해왔지만 이자율이 내려가는 속도는 그보다 훨씬 빨랐다. 경제학의 기본 원리에 따르면 이자율이 장기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는 저축과 투자의 흐름이 결정한다. 저축이 투자수요를 초과하면 이자율이 내려가는데, 1980년대 이후 이런 경향이 강화되었다. 미국을 포함한 주요 선진국의 실질금리는 지난 40년간 3%포인트 이상 하락했고 현재는 마이너스 영역에 들어간 상태다.


무엇 때문에 이자율이 이렇게 하락했을까? 경제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선진국 수준에 이를 때까지 성장률과 이자율이 조금씩 내려가는 것은 표준적인 성장이론이 예측하는 바이며, 실제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국가가 이런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문제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 성장률이 충분히 낮아진 다음에도 이자율이 계속 하락했다는 점이다. 성장률이 1~2%로 낮아지고 그 정도에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면 이자율도 그에 상응하는 수준에서 오르내리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하지만 이자율은 예상보다 더 많이 하락했다.


서머스는 여기서 섬뜩한 문제를 제기한다. 공공의료비와 연금 등 사회보장지출의 확대가 없었다면 이자율은 더 내려갔을지 모른다. 지난 40여년 동안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이 올라갔는데, 만약 재정 확대와 국가부채비율 상승이 없었다면 이자율은 더 하락했을 것이다. 국채발행에 의한 재정적자의 보전, 즉 정부의 자금수요 증가는 이자율을 올리는 요인인데, 정부 부문에서 발생한 지속적인 자금수요가 이자율이 더 내려가는 것을 막아온 셈이다. 서머스의 가상실험에 따르면, 미국에서 1970년 이후 국가부채의 증가는 이자율을 1.5%포인트 올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국가부채비율이 1970년 수준을 유지하고 늘지 않았다면 이자율이 지금보다 1.5%포인트 더 낮아졌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목격하는 이자율도 매우 낮은 수준인데, 그마저도 공공부문의 추가적 자금수요가 없다면 지탱이 안 된다는 뜻이다. 민간 부문은 이미 만성적인 수요부족 상태에 빠진 상태다.


민간 부문이 만성적인 수요부족 상태에 빠진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구조적 요인을 서머스의 관점에서 꼽아보자면 크게 세 가지다. 기대수명의 연장, 소득의 불안정, 불평등의 확대인데, 모두 소비성향을 낮추는 요인들이다. 일해서 버는 소득이 불안정해진 상태에서 어떻게든 소비하고 살아남아야 할 기간이 연장되는 것은 사람들의 저축성향을 높이고 소비성향을 낮춘다. 소득불평등, 즉 소비성향이 낮은 고소득층에게 소득이 집중되는 현상은 사회 전체의 소비성향을 떨어뜨린다. 소비 부족과 저축의 과잉은 이자율 하락이라는 현상으로 표출된다.


전미경제학회의 마지막날에는 재패니피케이션(일본화)이라는 주제의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일본은 서머스의 장기침체론에 들어맞는 대표적 선진국이자, 우리 시각에서는 인구구조나 산업구조 면에서 면밀하게 관찰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물론 일본만 사정이 나쁜 것이 아니라 유럽 경제도 지지부진하다. 자기 나라의 일이든 아니든, 큰 폭의 적자를 감수하며 재정을 확대하고 기준금리를 마이너스로 낮추는 지경에 이른 현대 경제를 지켜보자니 경제학자로서 새삼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어떻게 하면 장기침체론과 일본화가 안겨주는 당혹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용기를 잃지 않는 것, 특히 정책 대응의 용기를 잃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우리의 장점은 앞서간 선진국들이 어떤 함정에 빠졌고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에는 여러 대응책을 펼 여력이 있고 민간에는 아직 시들지 않은 능력과 의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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