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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무엇이 덜 나쁜가
- 하준경 위원 -

201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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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무엇이 덜 나쁜가     원문보기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 출처 : 동아일보(2019. 10. 28)

 

교수들 중엔 서울 강남에 사는 이들이 많다. 의사 변호사들도 그렇다. 너무 많아서 이 지역 인구 중 고학력자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봤다. 인구 총조사 결과를 보니 서울 서초구는 25세 이상 인구 중 18.6%(2015년)가 석·박사였고 강남구는 16.5%였다. 서울에서 이 비율이 가장 낮은 구가 2.8%이니 수도권에서도 격차는 매우 크다.

 

지역 간 학력 격차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도 살펴봤다. 대졸자 비율만 보면 격차는 줄었다. 그러나 석·박사 비중의 지역 간 격차는 확대됐다. 의사들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박사들만 놓고 봐도 그렇다. 고학력자 모여 살기 현상이다. 왜 그럴까. 직장과 주거지를 가까운 곳에 두는 ‘직주 근접’으로 효율을 높이려는 걸까. 답은 부정적이다. 이들의 통근시간 추이를 보니 실상은 직주 분리다. 서초·강남구의 45분 이상 통근자 비중은 계속 늘어 30%가 넘었고 평균 통근시간도 길어졌다.

 

고학력자들이 굳이 특정 지역에 모이는 가장 큰 이유는 자녀 교육 때문이다. 이들은 사회경제적 지위는 높지만 자녀에게 물려줄 빌딩이나 회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학벌을 물려주려는 욕구가 강하다. 똑똑한 유전자를 물려주지 않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수많은 연구 결과들은 ‘용의 씨’는 고르게 뿌려진다는 가설을 지지한다. 유전자로 학력세습이 된다면 석·박사들이 왜 무리해가며 ‘교육특구’로 모이겠나. 월급의 반을 사교육에 쓰며 밤 12시 반에 학원가로 자녀 데리러 나가는 교수 아빠들은 왜 그러겠나.

 

최근 수시 학생부종합(비교과)전형이 학력세습 통로가 된다는 비판을 받자 정시(수능) 확대가 화두가 됐다. 그러나 대학교육협의회가 2015, 2016년 대학 신입생 24만여 명을 조사한 결과 소득 상위계층 비중은 ‘논술>정시>학종>학생부교과(내신)’ 순이었다. 학종이 세습수단이라면 내신 비중을 늘려야지 왜 더 ‘금수저 전형’인 정시를 늘리나.

 

수능 점수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뿐 아니라 교육특구 거주 여부의 영향도 강하게 받는다. 김영철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지능이 같더라도 거주지 학습 환경과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수능 등급이 바뀌는 경향이 있다. 특히 거주지 특성이 강한 영향을 준다. 다른 조건이 같을 때 서울 교육특구가 수능에 가장 유리하고, 중소도시나 읍면지역은 크게 불리하다. 교육특구로 이사한 지인들은 정시 확대를 반기고 있다.

 

거주지에 따른 차별화는 또래집단과 롤모델, 사교육 인프라 효과 때문이다. 획일화된 시험에선 이 효과들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수능 문제를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꼬아서 낸 문제를 빨리 풀려면 요령이 필요한데 이를 알려줄 학원과 훈련에 순응하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훈련하는 학생들이 옆에 많을수록 효과는 올라간다. 그러나 입시에 최적화된 이 효과는 대학에 가면 무용지물이다. 대학에선 스스로 동기 부여가 된 학생들, 시골에서 학교 공부 잘했던 학생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일이 많다. 수능은 스포츠경기 수준의 공정성은 충족시킬지 모르지만 정말 중요한 ‘대학수학능력’은 정확히 측정하지 못한다. 심하게 말하면 수능 점수를 높이려는 노력들이 역설적으로 수능을 학생의 ‘배경’을 ‘공정하게’ 측정하는 방향으로 변질시킨다는 느낌이 든다.

 

학종에 문제가 있으면 손을 봐야 한다. 그렇다고 정시를 늘리는 건 경제력과 거주지 프리미엄의 효과를 더 키우는 일이 된다. 서울대 자체 시뮬레이션 결과 정시 비중을 50%로 높이면 강남 3구 출신이 84% 늘어난다고 한다. 교육특구 부동산 선호는 더 높아질 것이고 사교육 영향력은 더 커질 것이다.

 

학종 비중을 꼭 줄여야 한다면 수능보다는 내신(학생부교과), 지역·기회균형선발을 확대하는 것이 낫다. 내신을 중시하면 급우 간 경쟁이 극심해진다는 지적도 있지만 내신 경쟁이 심한 것은 애초에 비슷한 아이들이 너무 많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내신이 중요해지면 자녀교육을 위해 모였던 이들은 다시 곳곳으로 분산되고 소외지역 고교들은 활력을 찾을 것이며 지역 균형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이 미국에서 검증된 지역균형선발의 효과다. 반면 수능이 더 중요해지면 지역 서열화, 사교육 경쟁이 극심해지며 교육특구로 더 많이 모여들 것이다. 무엇이 덜 나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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